Freak Show 2020

Freak Show 2020 

single channel video, 14`28``, 2019

이물 옥정호 
     
 우아름

유머, 풍자, 연민, 고행, 수련. 옥정호가 허구한 날 들어왔다는 단어들이다. 유머는 왜 고행이 되며, 수련은 어떻게 풍자를 일구는가. 연민은 이 모든 것의 순환에 어떻게 스며드는가. 문장 속 자리를 바꿔도 뜻이 통하는 이 단어들은 서로에게 몸을 내어 주며 그의 작업 세계를 일궈 왔다. 이 단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그의 ‘몸’이다.
옥정호는 자기 자신을 던져 세상을 포착해 왔다. 처음에는 설설, 손가락질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교회의 뾰족한 첨탑이나 국회의사당의 둥근 돔을 흉내 낸 고깔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건축물 앞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은 〈기념촬〉(2001~2005) 시리즈나, 신도시 전원주택 앞에서 직접 “하하하”라고 쓴 팻말을 들고 촬한 〈하하하〉(2003) 등의 초창기 작업에서 그는 풍경을 채집하면서 손쉬운 상징으로 의미를 대체한 도시 허세의 면면을 꼬집어냈다. 해를 이어 연달아 두 번의 개인전을 열던 시기의 그는 발랄하고, 의심이 없어 보다.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선보인 세 번째 개인전 〈거룩한 풍경〉(2011)전에서 그는 바깥의 숱한 상징을 버리고 저 자신의 몸에 집중했다. 웰빙용 스포츠에 대한 아니꼬움으로 요가를 배워 간간이 색동 쫄쫄이를 입고 무지개 동작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던 그는, 정장을 갖춰 입고 뻘밭으로 가 진지하게 여러 가지 요가 자세를 취하기에 이른다. 삶이 곤궁한 때가 오면, 우습던 것들 속에 깃든 거룩함에 눈이 뜨이곤 하는 것일까. 지시하는 몸짓으로 세상의 기호를 포착해 조롱하던 그가 이제 저 자신의 몸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에 연민이 깃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던 것 같다.
작가가 요가를 했던 장소들을 나열해 본다. 뻘밭, 나무숲, 술집이 즐비한 새벽의 거리, 새벽의 주택가 골목. 도시의 기호를 버리고 자연으로, 자신의 침묵 속으로 담담히 들어갔던 그가 명상의 자세를 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새벽 어스름 속 뿌리 뽑힌 현대인들 사이에서 그가 요가를 할 때, 그 부질없는 수행이 빚어내는 속절없는 풍경은 혼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아침을 맞는 도시인에게 선사하는 진혼곡 같기도 하다.  
그리고는 몸을 터전 삼아, 숱한 고행을 자처한다. 도시와 자연의 배경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하게 솟아오른 〈훌륭한 자세〉(2015) 시리즈나, 멀리 뛰기의 단계별 제스처를 같은 위치에서 포착해 내기까지 숱하게 뛰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멀리 뛰기〉(2016) 연작에는 숱한 뛰어오름의 흔적이 담겨 있다. 마치 몸을 쓰는 것만이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기라도 한 듯, 이 시기의 그는 러닝머신 위에서 삼보일배를 감행하거나 물구나무 기구를 활용해 물고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등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작품 속 그의 몸은 망가져 간다. 
최근 몇 년 동안 작가는 기형이 된 몸을 가지고 이야기의 세계를 빚어 가고 있다. 〈미망인〉(2018)과 〈Freak Show 2020〉(2019)에서 그의 몸은 두 동강이 나기에 이른다. 수많은 사회적 죽음을 겪으면서 무기력증을 앓던 현실의 옥정호는 〈미망인〉 작품 속 세계에서 두 동강 난 몸으로 다양한 삶의 공간을 누비고, 유년 시절 뜻 모르고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외워 빈 숲을 향해 외친다. 그의 목에는 핏대가 서렸지만, 그의 외침은 대나무 숲에 잡아 먹혔다. 과거의 수치를 게워 현재의 무기력을 파기하는 이 장면은 잘 빚어낸 모순이다. 숱한 죽음을 통과해,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그럴 수밖에 없는’ 형용 모순을 우리 모두에게 내어주면서 위로한다. 길 잃은 자가, 길 잃은 자들에게 보내는 식별이자 구원의 몸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