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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 옥정호 
     
 우아름

유머, 풍자, 연민, 고행, 수련. 옥정호가 허구한 날 들어왔다는 단어들이다. 유머는 왜 고행이 되며, 수련은 어떻게 풍자를 일구는가. 연민은 이 모든 것의 순환에 어떻게 스며드는가. 문장 속 자리를 바꿔도 뜻이 통하는 이 단어들은 서로에게 몸을 내어 주며 그의 작업 세계를 일궈 왔다. 이 단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그의 ‘몸’이다.
옥정호는 자기 자신을 던져 세상을 포착해 왔다. 처음에는 설설, 손가락질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교회의 뾰족한 첨탑이나 국회의사당의 둥근 돔을 흉내 낸 고깔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건축물 앞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은 〈기념촬〉(2001~2005) 시리즈나, 신도시 전원주택 앞에서 직접 “하하하”라고 쓴 팻말을 들고 촬한 〈하하하〉(2003) 등의 초창기 작업에서 그는 풍경을 채집하면서 손쉬운 상징으로 의미를 대체한 도시 허세의 면면을 꼬집어냈다. 해를 이어 연달아 두 번의 개인전을 열던 시기의 그는 발랄하고, 의심이 없어 보다.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선보인 세 번째 개인전 〈거룩한 풍경〉(2011)전에서 그는 바깥의 숱한 상징을 버리고 저 자신의 몸에 집중했다. 웰빙용 스포츠에 대한 아니꼬움으로 요가를 배워 간간이 색동 쫄쫄이를 입고 무지개 동작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던 그는, 정장을 갖춰 입고 뻘밭으로 가 진지하게 여러 가지 요가 자세를 취하기에 이른다. 삶이 곤궁한 때가 오면, 우습던 것들 속에 깃든 거룩함에 눈이 뜨이곤 하는 것일까. 지시하는 몸짓으로 세상의 기호를 포착해 조롱하던 그가 이제 저 자신의 몸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에 연민이 깃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던 것 같다.
작가가 요가를 했던 장소들을 나열해 본다. 뻘밭, 나무숲, 술집이 즐비한 새벽의 거리, 새벽의 주택가 골목. 도시의 기호를 버리고 자연으로, 자신의 침묵 속으로 담담히 들어갔던 그가 명상의 자세를 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새벽 어스름 속 뿌리 뽑힌 현대인들 사이에서 그가 요가를 할 때, 그 부질없는 수행이 빚어내는 속절없는 풍경은 혼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아침을 맞는 도시인에게 선사하는 진혼곡 같기도 하다.  
그리고는 몸을 터전 삼아, 숱한 고행을 자처한다. 도시와 자연의 배경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하게 솟아오른 〈훌륭한 자세〉(2015) 시리즈나, 멀리 뛰기의 단계별 제스처를 같은 위치에서 포착해 내기까지 숱하게 뛰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멀리 뛰기〉(2016) 연작에는 숱한 뛰어오름의 흔적이 담겨 있다. 마치 몸을 쓰는 것만이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기라도 한 듯, 이 시기의 그는 러닝머신 위에서 삼보일배를 감행하거나 물구나무 기구를 활용해 물고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등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작품 속 그의 몸은 망가져 간다. 
최근 몇 년 동안 작가는 기형이 된 몸을 가지고 이야기의 세계를 빚어 가고 있다. 〈미망인〉(2018)과 〈Freak Show 2020〉(2019)에서 그의 몸은 두 동강이 나기에 이른다. 수많은 사회적 죽음을 겪으면서 무기력증을 앓던 현실의 옥정호는 〈미망인〉 작품 속 세계에서 두 동강 난 몸으로 다양한 삶의 공간을 누비고, 유년 시절 뜻 모르고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외워 빈 숲을 향해 외친다. 그의 목에는 핏대가 서렸지만, 그의 외침은 대나무 숲에 잡아 먹혔다. 과거의 수치를 게워 현재의 무기력을 파기하는 이 장면은 잘 빚어낸 모순이다. 숱한 죽음을 통과해,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그럴 수밖에 없는’ 형용 모순을 우리 모두에게 내어주면서 위로한다. 길 잃은 자가, 길 잃은 자들에게 보내는 식별이자 구원의 몸짓이다. 

최근 그는 〈Freak Show 2020〉(2019)라는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에는 그의 페르소나가 반 토막 난 신체를 지니게 되기까지의 전사를 다룬다. 이야기는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또한 환상적이다. 마술사의 공연을 위한 무대 공사 현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사를 위해 동원된 비정규직 인부는 무대 위 마술사를 흠모한다.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한눈을 판 대가로 그는 손가락을 잘린다. 마술사는 마술로 인부의 손가락을 붙여주지만, 인부가 무대에 서고 싶어 하자 몸을 두 동강 낼 것을 제안한다. 인부는 몸을 자르는 고통을 감내하지만,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는 마술사에게 집중될 뿐이다. 인부의 두 동강 난 몸은 서로를 의지하며 강가로 나가 나란히, 속절없이 앉는다. 그 한 사람아닌-두 사람의 곁에 무지개가 떠올라, 환상인 듯 과거인 듯 모호한 미장센이 연출된다.
영화에는 마술사를 위한 무대 공간이 등장해 액자형 구조를 이룬다. 배역들, 즉 공적인 역할들의 활동의 공간인 동시에 온갖 환상들의 장소인 마술-연극의 무대는 정체성의 분할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 혼란 속에서, 과거 폭력의 장치던 프릭쇼(freak show)의 무대는 능동적인 상연의 공간이 된다. 영화는 무대 위 드랙(drag)의 퍼포먼스로 시작하고, 이 무대는 마술사에게로 넘겨진다. 화 속 무대 공간은 인정받은 자들, 완성된 자들의 세계다. 극 중 인부는 무대 위의 세계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환상의 세계에 여전히 작동하는 현실의 논리는 더욱 파괴력을 발휘한다. 인부는 두 동강 난 미완의 몸으로 그들만의 무대를 떠나 강가로 나온다. 완성된 자들의 약속된 세계에 들어가는 대신 현실의 누추한 자리에 머무르는 편을 택한 것이다.
이 장면이 옥정호 작가가 도달한 현재다. 옥정호는 자기 자신을 세계에 이물로 제시해 왔다. 첨탑 모자를 쓰고 서울의 숱한 교회 지붕과 함께 사진을 찍던 옥정호부터, 두 동강 난 몸으로 무대 위 세계를 떠난 옥정호까지, 그의 작업의 연대기는 수많은 이물 옥정호로 채워진다. 보호색이 아닌 무지개 의상을 입고서 세상에 동의하지 않는 자신이 있다고, 불편한 자신이 있다고 찬란하게 가시화하는 것이다. 낯선 타자의 자리를 삭제해 통일감을 느끼는 면역 논리의 세계에서 그는 스스로 타자가 되어 끊임없이 움직여 이물감을 일으키려 한다. 그래서 그는 부단히 몸을 쓴다. 몸을 써서 유머와 연민과 고행과 수련의 길을 지나간다. 그의 작업을 보고 있자니 무릎이 아파온다.